별세 ㅣ 숙환

2023. 1. 26. 22:00ㅣ 기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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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록하는 기억ㅣ하히 라의 한중록

 

 

 

향년 90세의 숙환

 

 

나에게 할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셨다.

얼마나 무서웠냐 말하자면_  같이 있는 거 자체를 피하고 싶을 만큼 무서웠다. 그런 할아버지의 헛기침소리 나 집에 다다르고 있다는 공식적인 신호였던 할아버지가 타고 나가셨던 오토바이 소리가 가까이 들려올 때면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할아버지는 그렇게도 여자는 쓸모없다 말하셨다. 아들이 최고이고 여자는 쓸데가 없다는 이야기를 주야장천 말하셨다. 본인도 엄마라는 여자에게서 잉태되어 태어난 인간이면서 어찌 여자를 저렇게 말하고 평하는지 _ 내 할아버지가 얼마나 모진 사람이냐면 저런 말을 어리고 어린 내게 수십 번 말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빠에게서 "너도 들었지? 할아버지가 넌 필요 없는 인간 이랬어! 그러니 맞아도 돼" 라면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고 여자이기에 쓸데없으니 나가죽으라는 말도 들어왔었다.

 

그렇게 내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자 할머니 병간호와 자신의 간병 그리고 치매가 걸린 말년까지 맏며느리인 엄마에게 모든 수고를 들게 한 사람이 내 할아버지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여자는 쓸데없다 해놓고 우리 엄마라는 여자를 그렇게도 많이도, 그리고 알차게 쓰셨던 분이셨다.

 

 

향년 90세에 숙환으로 별세하신 나의 할아버지.

 

미웠던 마음과 당신을 무서워했던 그 어린 시절이 지배적인 기억이지만 알 수 없는 슬픔과 인간의 인생이란 이리도 허무한가를 생각하며 나는 눈물과 콧물이 넘쳐흘렀고 얼굴은 빨갛게 열이 올랐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엄마와 밥을 먹었다. 아기를 보기 위해 남편과는 교대로 왔다 갔다 하며 인사와 식사를 따로 하였다.

 

마주 앉아 육개장을 먹던 엄마는 최고 좋은 수의를 해 입혔다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정말 마음에 들도록 너희 할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모습이 단장되었노라 말씀해주었다. 어쩜 그렇게 깨끗하고 이쁘게 계신다고 말이다. 그 말을 하는 엄마의 표정이 한껏 야무진 걸 보니 진정 그러한 것 같았다.

 

엄마는 어쩌면 너희 할아버지는 그렇게 고맙게도 아침에 가셨으며_ 나를 위해 이리 장례 준비도 차근히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냐며_  새벽잠은 깨우지도 않고 너무 늦은 밤에 가시지도 않아 하루를 허이보내며 삼일장을 치루지도 않고 장례 손님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복이 참 많아 좋다는 말도 이어졌다.

 

 

 


 

엄마다웠다.

 

세상 모든 일을 감사히 여기고 고마워하시며

이치와 가치를 좋게 여기는 그 마음이 그날도 여전히 엄마다웠다.

 


 

 

 

 

 

 

 

 

 

 


※ 이 글의 시작은 하히라의 브런치에서 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출처 : 기록하는 기억ㅣ하히 라의 한중록 매거진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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